개혁주의 예배의 아름다움
성경말씀:요한복음4장23~24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오늘날 [열린 예배]라는 말은 기독교계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열린 예배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자는 의미에서 출발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배라는 행위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안다면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 곧 예배입니다.
(1) 예배는 누구를 위해서,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가?
이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드리는 자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리는 자의 수가 얼마이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처음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최초의 예배 방문자가 참여하기에 쉽게 하자는 이유에서 입니다.
그래서 찬송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ccm을 부르고,
설교도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설교를 합니다.
모든 의식을 버리고 그들이 편하고, 쉽게 예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각종 악기들이 동원되고, 드라마나 연극 등이 설교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것이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소위 [열린 예배]를 하고자 하는 자들과 또 실제 하고 있는 자들은 진정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나 하는가?
의심 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회의 예배 현실이 이 지경이 된 것은 현재의 예배가 형식적이고 고리타분해서가 아니라 예배 그 자체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성경적인 예배를 더욱 강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신자들 중에는 예배가 형식적이다, 무미건조하다, 가슴이 냉냉하다, 이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장로교의 예배를 장례식과 같다는 표현을 하는 자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교파교회처럼 예배시간에 박수를 치고, 악기도 사용하고, 그래서 살아있고 생동감 있는 예배를 드리자고 충언을 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예배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라고 반문하고자 합니다.
예배는 무엇이며, 누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며, 누가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이런 질문에 대해 바른 성경적인 고백을 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헛된 예배를 드려 온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전합니다.
(호4: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당시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하기는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배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망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없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즉 예배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 대한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예배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운집하여 예배를 드렸다고 해도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과 나 자신, 개인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경우 그 전체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서도 아마 극소수 몇 사람의 예배만 받으시든지 하나도 받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소위 {가나안 교인}이 늘고 있습니다.
{가나안 교인이란 교회에 안나가는 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동네 멀지 않은 곳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신나게 추는 트롯트목사가 있는데 감리교 간판을 내리고 {가나안교인 예배처}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나는 오래전에 교회음악 전문가로서 그에게 페이스북에서 목사직을 내려놓든지 그 짓을 하지 말든지 하라고 냉엄하게 경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짓을 선호하는 교회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
예배는 사람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2) 예배의 정의
성경에서는 두 가지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자 개인이 자신의 몸을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예배를 말합니다.
(롬12: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예배는 공적인 예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삶[가정, 사회, 직장, 국가]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는 이 세상의 세속적 가치관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배는 회중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입니다.
이 공적인 예배의 특징은 교회의 모든 회중이 모인 가운데서 형식을 갖춘 순서에 의하게 되고 맡은 자의 봉사를 통해 드려집니다.
그런데 공적인 예배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릅니다.
그 위험의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형식에 의존되다.
형식을 갖추고 수행되기 때문에 형식에 매이기 쉽습니다.
예배에는 모든 형식이나 의식 등의 순서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예배의 시작도 [땡]하는 시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정해진 시간을 엄수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등의 형식에 매이게 되는 것을 [외식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23:23)[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정해진 모든 형식은 정확하게 행하였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공의와 자비와 믿음은 버렸다고 책망하십니다.
(2) 예배는 하나님과 드리는 자와의 관계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바른 예배를 갈망하는 신자들의 이동이 교회에서 발생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른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몇몇 가정이 새로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아예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기성교회는 많은 반성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그룹을 이루고 있는 것을 형제교회(브레드린 쳐치)라고 합니다.
형제교회는 1820년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영국 교회는 정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지나치게 제도화된 성직자 제도, 형식주의, 율법주의, 교파주의 등의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형제교회는 이러한 영국 교회가 비성서적이라 주장하며 공식적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모임에 모인 사람들을 서로 [형제](Brethren)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이들의 모임을[형제교회]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한국에는1890년대에 일본과 영국의 형제교회 선교사에 의해 유입이 되었고 이후 1980년대에는 전국 180여 개 형제교회가 생기는 등의 활동을 보였습니다.
형제교회가 기성교회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앙 고백이나 신조를 문서화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해 거부합니다.
따라서 사도신경 등 어떤 신조나 헌법, 규칙, 유전 등을 인정하거나 만들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주기도문도 형식적으로 암송하는 경향이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사용하되 공식 집회에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2. 교회는 한 몸이라는 이유로, 지역으로 교회가 나뉘어 모이는 것 이외에 교파를 만들거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구별해 부르는 교파 명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며 교단을 결성해 그 대표자를 세우는 일을 배격합니다.
각 지역교회도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한 사람이 독점적으로 교회를 지도하는 것을 삼가고 여러 사람이(장로들) 의논해 이끄는 방식을 취합니다. 3. 성찬식과 침례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특히 성만찬(만찬예배)을 매 주일 행하여 예배 행위의 핵심으로 여깁니다.
이때 [만인 제사장]개념에 따라 모든 구성원(침례교인 이상, 특히 남자 신자 위주)이 감사기도, 찬송, 성경 낭독 등에 참여합니다.
침례의 방법으로는 물에 담그는 침수 예식을 행합니다. 4. 교역자 양성 및 안수 등을 제도화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감독(장로)과 집사만 인정합니다.
설교를 주로 담당하고 외부적으로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를 인정하기도 해 대외적으로는 대표되는 장로를 목사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목사나 장로로 호칭하지 않고 그냥 아무개 형제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밖에 주일학교 교사 등에 대해서도 특별히 교사로 호칭하지 않습니다. 5.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제도를 거부합니다.
성직자 제도는 비성서적이라고 보고 어떤 제도화된 신학 교육을 받도록 권장하지 않습니다.
형제교회 지도자 중에는 다른 교파의 신학 교육을 받은 인물들도 많이 있으나 이들을 특별히 권위 있는 지도자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6. 여성들은 교회에서 활동이나 봉사에 일정한 제한을 둡니다.
여성들이 회중을 대표해 기도하거나, 회중 앞에 나서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금합니다.
단, 여성들만 모이는 집회에서는 여성들이 가르치거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1장을 근거로 여성들은 모든 집회시에 머리에 너울(수건)을 쓰고 참여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형제교회는 기성교회와는 다른 신학적, 제도적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한국 교단에서 형제교회에 대해 공식적으로 결의 한 바는 없습니다.
이들의 예배의 목적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도는 좋게 보이지만 이들의 예배에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디모데후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딤후3:15~17)[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경, 진리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참 의미는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해야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